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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이 원한 건 한민족 통합과 국민 주권의 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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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군효송 작성일19-03-26 18:4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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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2부> 임시정부가 꿈꿨던 나라 ④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 인터뷰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25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회장은 임정 요인 후손들, 임정과 연결된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고자 2004년 기념사업회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임시정부가 꿈꿨던 나라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조국이 반으로 쪼개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김자동(91)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은 임시정부를 몸으로 겪은, 이제 몇 남지 않은 임시정부의 산증인이다. 김 회장은 1928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인근 아이런리(愛仁里)에서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의한과 모친 정정화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아저씨라 부르며 따라다녔고,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이어지는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 때 충칭에서 1945년 8월 15일 당일 “왜놈이 항복했다!”라는 잊지 못할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김 회장은 인터뷰 내내 통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임시정부가 그렸던 나라는 하나의 국가이며, 지금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남북 평화 정착이라고 했다. 그는 “임시정부는 해외 망명정부였지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데 각별히 신경을 썼다”며 “그래서 광복 후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서게 됐을 때 도저히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 귀가 어두워 때로 필담으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김 회장은 두 시간이 넘도록 지친 기색 없이 오랜 삶의 기억, 역사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꺼내놨다. 임시정부의 기억을 더듬는 그의 눈이 10대처럼 빛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동녕(뒷줄 왼쪽 네 번째) 임시정부 주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1933년 중국 저장성 자싱에서 백범 김구(뒷줄 오른쪽 세 번째)의 피신을 도와준 중국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의 어머니 정정화(앞줄 왼쪽 두 번째) 여사가 어린 김 회장을 안고 있다. 뒷줄 왼쪽 세 번째는 김 회장의 아버지 김의한 선생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00년 전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나.

“조선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명목적으로는 황제가 있는 제국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뒤 소수였지만 독립된 나라에 왕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임시정부를 만든 사람들은 왕정복고와 명백히 선을 긋고 국민주권의 민주공화국을 꿈꿨다. 다양한 세력이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했지만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원칙은 일치됐다. 이제 남한에는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정착됐지만 여전히 반쪽짜리라 할 수 있다. 북한과의 통일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북의 통합과 평화는 임시정부의 오래된 꿈이다. 그들이 꿈꾼 나라의 모습 중 어디에도 분단 국가는 없었다. 다양한 생각을 지닌 세력의 공존을 꿈꿨던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 국가를 추구해야 한다. 평화 정착과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현 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은 기본적으로 옳다고 본다.”

-민주공화제 정착을 위해 임시정부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사회복지국가는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이들을 포함해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공통된 이상향이었다. 정치에서의 자유, 경제·교육·문화 영역에서의 평등은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핵심 정신이었다. 현재의 사회민주주의와 상당히 유사한데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는 전반적으로 경제 기반 자체가 열악한 사회였고, 문맹률도 높았다. 사회 발전을 위해 우선 개별 경제주체들의 수준을 높이고 균등한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임시정부 초창기 어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국민 개개인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정치·경제·교육 균등) 이론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현재의 복지국가와도 연결되는 주장이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어디에 있나.

“당시 해외 망명 독립 세력은 온전히 통합되지 못했다. 다양한 사상적 배경 하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이름으로 이를 통합하려 했다. 실질적인 성과도 있었다. 소련 등 공산주의 진영의 지원을 받고 있던 중국 옌안(延安)의 독립운동 세력을 제외하고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까지 사실상 모든 세력이 통합됐다. 1945년 초반까지도 ‘연안파’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던 김두봉을 만나 좌·우 합작을 논의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바로 민족연합의 정신에서 나온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임시정부 요인이 있나.

“백범 선생이다. 내가 날 때부터 이웃에 살다시피 했다. 이 어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만나는 사람 누구나 특별한 이유 없이 좋아했다. 어떤 사람에게도 따스하고 친절히 대하는 성품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분명해서 왜놈 앞잡이만큼은 무섭게 응징했다. 백범 선생이 처음 임시정부로 왔을 때 사람들은 선생의 생김새가 거친데다, 공부를 한 사람 같지 않다는 이유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금세 선생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차렸다. 이동녕 선생의 뒤를 이은 차기 주석은 백범 선생이라는 암묵적 동의가 임시정부 내에 만들어졌고 자연스레 주석으로 추대됐다. 임시정부 주석이 된 후에도 워낙 포용력 있게 일을 잘 처리하다보니 좌익에 경도된 이가 아니라면 모두가 백범 선생을 민족의 실질적 리더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사업회를 시작한 지 15년이 흘렀다. 임시정부 요인 후손 중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아무개 선생 기념사업회’ 같은 단체를 만들곤 했다. 우리 가족 안에서도 부친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후손 가운데 살 만한 사람들이나 기념사업회를 만들지 상당수 후손들은 형편이 좋지 않아 기념사업회 설립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바에 임시정부 전체를 아울러 기리는 단체를 만들자, 그러면 임시정부와 연결된 사람들의 구심점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북한에 임시정부 어른들을 모셔둔 애국열사릉이라는 곳이 있다. 성묘 목적으로 방문을 허가해 달라고 김대중정부 때부터 요구했지만 북측은 ‘대한민국’이라는 명칭 탓에 난색을 표했다. 지속적으로 요청했고 마침내 노무현정부 때 임시정부 요인 후손 25명을 포함해 50명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북측은 우리 단체에 대해 ‘저 단체는 좌익 단체가 아니다. 우리 동지는 아니지만 항일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후손인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부족함 없는 대우를 받았다.”

이형민 김성훈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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